Ilya Yefimovich Repin

1844.8.5. - 1930.9.29.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인물화의 거장.





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츄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았다.

레핀은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수리코프 등과 함께 <이동전람파>를 구성했다.

러시아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모순들을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궁핍하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사는 민중들의 모습과 그들을 계몽하는 인텔리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18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생애 말년을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보냈고 1930년 9월 29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쿠르스크 주의 십자가 행렬>

에 숨겨진 이야기와 그가 묘사한 사회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자.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1870-1873

제국예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레핀은 날이 좋은 휴일에 네바강에 갔다가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는 상류층 사이 강가에서 배를 끄는 평민들을 보게 된다.
당시에는 수심이 얕은 항만에 접근이 어려운 배를 인부들이 마치 가축처럼 끌어 올려야 했다.
이 모습에 충격을 받은 레핀은 이 장면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해외유학을 포기하고 근처의 볼가강으로 향한다.


다양한 인부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들은 레핀은 절망이 아닌
그들의 삶, 경험, 인간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파문당한 사제 카닌.

레핀 자신에게 많은 정신적 영향을 준 카닌을
민중의 현자로 제시하고 대열을 이끌어가도록 했다.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러시아호를 이끌 정신적 수호자이자
지친 영혼을 다독이고 쓰러진 민중을 일으켜줄 지도자를 나타낸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년.

일이 익숙하지 않은지 띠를 엉성히 잡고 있다.
다른 인부들과 달리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한다.
소년이 바라보는 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상향이다.
현실을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낼 젊은 생명을 상징한다.

고개를 돌려 현실을 부정하는 인부.

깊이 파인 주름이 삶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헤어나지 못할 현실의 무게에 오직 침묵만으로 버티는
러시아 민중들을 대변한다.

뒤집힌 러시아 국기

사회적 불평등과 가혹한 노동 현실등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나타낸다.

증기선

증기선은 범선과 달리 인부들이 힘겹게 끌어올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범선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값이 증기선보다 싸기 때문이다.
진보에서 소외된 민중의 현실과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다.

레핀은 그림 속의 인부들 개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사회 모순에 저항하고 역경을 헤쳐나가는 개혁의 주체로 제시한다.



잔뜩 헤지고 찢어진 누더기 옷,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에서는 비참함이 아닌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8

1879년에 결성된 러시아 제국의 “인민의 의지당”은 농민 봉기를 끌어내
보수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급진적인 선전과 부채질은 대다수에게 거부감만 심어줬고,
적은 지지층으로 할 수 있는 암살과 테러로 눈을 돌린다.

그들의 테러는 성공했으나, 기대했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민초들은 되레 인민의 의지당에 반감을 표했다.

수사 당국은 피의 숙청에 나섰고, 붙잡힌 이들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숨통이 붙어있으면 시베리아 유배지로 내몰렸다.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혁명가.

가족을 버리고 민중을 위한 정치 활동에 투신하다 체포되었던 그는
모진 고문과 긴 유형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피곤하고 남루해보이는 모습이지만 눈빛은 살아있다.
번뜩이는 눈빛은 굴하지 않는 당당함,
혁명가로서의 신념이 무너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혁명가의 어머니.

아들이 죽었을거라 생각하며 검은 옷을 꺼내 입었건만
죽을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돌아왔다.
본능적인 놀라움과 반가움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사내를 향해 달려가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다.

차르 전쟁을 맹렬하게 비판한 시인 타라스 셰브쳰코,
농민의 아픔을 소재로 한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초상화와
이들 사이 희생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이 중앙에 걸려있다.

사내가 집 밖에서도, 안에서도 뼛 속 깊이
인민의 의지당원이었음을 보여준다.

혁명가의 아내.

남편의 예고치 않은 귀환에 놀란 기색으로 바라보지만
그를 향한 눈빛은 메말라있다.
오랜만에 본 남편의 모습에도 반가움보다는 놀란 기색만 역력하다.

남자의 아이들.

조금 큰 아들은 어릴 적 아빠의 기억이 남아있는지 반가운 표정이다.
반면 어린 동생의 기억 속에 아빠의 존재는 없는지
낯선 남자의 등장에 경계의 눈빛만 가득하다.

오랜 유형을 끝내고 막 집으로 돌아온 혁명가와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그들 사이에는 애틋함과 반가움이 아닌 오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서로의 생사도 알 지 못한 채,
혁명가는 대의를 위한 삶을, 고향의 가족들은 묵묵히 일상을 보냈다.

남자가 들어온 입구가 아닌 화면 옆의 정원에서 따뜻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햇살이 부드럽게 비추는 오후의 평안을 깨고 그가 돌아온 것이다.

놀라움과 반가움, 경계와 두려움.
모두의 시선 한 가운데 그가 있다.

그가 오랫동안 바란 재회의 순간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 가족을 떠난 가장,
일상을 지키며 생활하던 가족.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시대가 만들어낸 각각의 삶의 모습일 뿐이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883-85

이반 4세는 이반 대제 또는 이반 뇌제로 불리는 러시아의 초대 차르이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과 법 개혁을 통해 러시아의 기틀을 세운 군주였으나,
아내의 죽음 이후 깊은 의심과 불안에 빠져 숙청 정책을 펼쳐 나라를 공포로 물들였다.
이 시기 이반의 정신은 극도로 불안정했으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81년, 왕세자의 아내가 궁정 예법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했다는 이유로
이반은 그녀를 심하게 폭행했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임신 중이던 아이를 잃었다.
왕세자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항의하자 분노에 잠식된 그는 이성을 잃고 만다.

이반 뇌제의 아들

황제에 의해 아내가 아이를 잃자 이에 대해 항의했으나
돌아온 것은 분노와 반역 의심뿐이었다.
분노한 황제가 휘두른 지팡이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죽어가는 그의 눈에서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연민이 흘러내린다.

이반 뇌제

러시아를 제국으로 이끈 초대 차르였지만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죽이고 만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있는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과 후회, 지울 수 없는 절망이 담겨있다.

쓰러진 가구와 어질러진 방 안은
분노가 휩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왕권을 나타내는 지팡이는
왕실의 미래를 살해한 도구로 전락했다.

아들을 때려죽인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아들.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인 순간 속,

레핀의 강렬하고 사실적인 감정표현은
우리를 이 참혹한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다.

쿠르스크 주의 십자가 행렬

1880-83

이 그림은 평범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십자가 행렬은 러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교회 안에 있는 성상화인 이콘이나 성물을 들고 행진하는 행사이다.
한 지역의 주민 거의 전부가 참여하는 중요한 행사이기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레핀은 이 사람들의 군상에서 민중을 묘사하려 했다.

화려한 의례복을 갖춰입은 사제는 무심한 듯 자신의 금발을 넘기고 있다.
종교적인 엄숙과는 전혀 상관없이 행사가 지루한 듯한 모습이다.

꽃가마를 지고 있는 수도자들에게서는 경건함이 아닌
무심하고 흐리멍텅한 표정이 보여진다.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지배층인 중산지주층을 대표하는 귀부인은
거만하게 이콘화를 들고 행진한다.
그 옆의 남편은 구걸하듯 팔을 붙잡는
걸인 부부를 거칠게 떼어낸다.

머리에 두건을 쓴 두 여인이 원래 이콘을 보관하던 것 처럼 보이는
빈 상자를 그것이 마치 이콘화인 듯 소중하게 들고 가고 있다.

말을 타고 있는 경찰 앞으로 수도사들이 손을 마주잡고
군중들이 가마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인간 사슬을 형성하고 있다.

흰 제복을 입은 한 기마 군인은
행렬을 방해하는 듯한 사람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절름발이 곱추 소년의 접근을 한 하급사제가 가로막는다.
그런 방해에도 소년은 무표정한 듯 앞으로 열심히 나아간다.
소년의 얼굴에는 행렬에 낀 사람들의 오만함도, 지루함도 없다.

행렬 안의 사람들은 그 옆의 민중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농노제의 폐지로 사람들 누구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지만,
사회는 여전히 빈부의 차이, 계급의 차이, 출생의 이유 등으로
여러가지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난다.

나무와 숲이 사라진 민둥산과 뽀얀 흙먼지는 훼손된 러시아적 정신을 나타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건조한 민중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신의 은총 역시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앞으로 걸어간다.